청춘의 역사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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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 열감기는 일주일 내내 동해를 괴롭히다가 겨우 떨어져 나갔다. 진작 병원 갈걸. 한미 약국이라고 적힌 약 봉지를 입에 털어넣고 물과 함께 한입에 삼킨 동해가 어기적 침대 속으로 기어들어갔다. 동해의 취향이 반영된 죽과 함께 도어락을 열었던 날을 마지막으로 혁재에게 이렇다 할 연락은 없었다. 동해도 구태여 연락하지 않았다. 다만 서로에 대한 부재를 오로지 혼자 버티는 것 같은 외로움이 억울했다. 아직 낫지 않은 미열이 있었다.



18. 와, 이러다가 진짜 학고 아니냐. 전공 수업이 끝나고 강의실을 나서면서 동해는 기억을 더듬어 결석 일수를 셌다. 1학기의 막바지를 달리는 시점에서 벌써 결석이 다섯 번이었다. 앞으로는 출석 좀 꼬박꼬박 하고, 공부도 하긴 해야 하는데. 팔에 끼고 있었던 전공 서적을 다시 고쳐 들다가 동해는 순간 행동을 멈췄다. 복도 코너에서 익숙한 얼굴이 보였다. 캐주얼한 아노락에 볼캡을 눌러 쓴 혁재 옆에는 혁재의 휴대폰에 부재 중 통화 열두 통을 찍어 댄 주인공이 있었다. 그녀는 한 손으로 입을 가리고 웃으면서 아무렇지 않게 혁재의 팔에 제 팔을 꿰었다. 향수 냄새가 진하게 났다. 그중에는 동해가 좋아하던 혁재의 향수 냄새도 섞여 있었다. 전공책이 둔탁한 소리를 내며 바닥으로 떨어졌다. 동해는 아무렇지 않게 다시 전공책을 집었다.



18-1. 안 한 지 오래돼서 -고작 이주일 지났지만- 괜히 몸정만 그리워지는 거라고 생각했다. 동해는 누운 채로 멍하니 휴대폰 화면만 들여다보고 있다가 연락처 상단에서 몇 번 손가락을 움직였다. 통화 연결음이 울리고 상대는 생각보다 빨리 전화를 받았다. 길어야 이삼분 대의 짧은 통화가 끝나고 동해는 그제서야 몸을 일으켰다. 통화 내용은 상대의 집에서 만나자는 게 다였고 상대는 혁재가 점심값을 댔던 그 후배였다.  



18-2. 흔들리는 천장에 열에 들뜬 상황에서도 제 자취방이 아닌 다른 장소는 꽤 오랜만이라고 생각했다. 후배는 억눌린 신음과 함께 파정한 뒤에 끈적한 몸을 떼어냈다. 사용한 콘돔을 대충 묶어 쓰레기통에 던져 넣는 걸 보면서 동해는 가만히 헐떡이고만 있었다. 반반한 얼굴에 비해 테크닉은 그냥 그랬다. 이혁재는 페이스 조절도 잘 했는데. 갑자기 들어차는 기억에 동해는 인상을 구기고 널부러진 속옷을 찾아 입었다. 아직 뻐근한 다리를 들어 바지 한 쪽에 꿰었을 때 후배가 물었다. 


근데 혁재 선배랑은 무슨 사이예요? 


정작 동해가 묻고 싶은 말이었다. 걔랑 나랑 대체 무슨 사이냐? 섹스 파트너였던 사이, 아니면 멍청하게 삽질하다가 예고된 부도 딱지에 더이상 공사도 못 하고 그렇다고 속 시원하게 철거도 못 하겠는 사이. 동해는 말을 삼켰다.


혁재 선배랑도 잤어요?


자신의 질문에 동해가 아무런 말이 없자 후배는 경로를 바꿔서 물었다. 눈치는 좆도 없어서 아니, 혁재 선배는 여친도 있는데, 하고 쓸데없는 말도 덧붙였다. 몇 시간 전 단대에서 봤던 혁재와 그의 여자 친구 모습이 떠올랐다.


아니.


동해는 짧게 대답한 뒤 겉옷을 챙겨서 후배의 자취방을 나섰다. 등 뒤에서 벌써 가는 거냐는 소리가 들렸지만 무시했다. 학교 앞 자취방들의 위치는 거기서 거기라 조금만 걸으면 집에 도착할 수 있는데도 동해는 앞이 막막한 기분이었다.



19. 소문이 돌았다. 혁재가 남자랑 잔다는 소문이었다. 술자리에서 몇 번 화두로 올랐다가 근데 그 선배 여자 친구 있잖아, 미대 2학년. 맞아, 설마 그 여친 놔두고 남자랑 자겠냐? 다른 이들의 반박에 오히려 들리는 말을 도마 위에 올린 사람이 몰매를 맞았다. 어디서 흘러온 헛소문인지 모르겠다며 금세 다른 이의 근황을 씹었다.



19-1. 이혁재는 미대 2학년 여자 친구와 한 달 만에 헤어졌다. 근거도 없는 소문 때문에 헤어진 거 아니냐는 말들이 오고 갔지만 그것도 또 하나의 소문일 뿐이었다.



19-2. 당사자는 뻔했다. 


니가 소문 냈냐?

딱히 그러려던 건 아니고. 그냥 이런 거 아닐까, 하고 추측성으로 얘기해 본 게 부풀려진 거예요. 알잖아요, 다들 과장하기 좋아하는 거.



19-3. 그리고 뻔뻔했다. 


그나저나 지금 뭐 해요? 할 일 없으면 우리 집 올, 

자꾸 허튼 소리 나불대면 다음 주인공은 너일 줄 알어. 


동해는 신경질적으로 통화 종료 버튼을 눌렀다. 소문 어디에도 동해는 언급되지 않았다. 애초에 배경도 없고 상황도 없는 한 줄 짜리 문장이 전부였다. 자기 일도 아닌데 왜 이렇게 신경이 쓰이고 열불이 나는지 도통 알 수 가 없었다. 짜증 나. 대답이라도 하듯 벨소리가 요란하게 울렸다. 동해는 침대에 엎어진 휴대폰을 거칠게 뒤집었다. 액정에 뜨는 이름은 이혁재였다. 명치 끝자락이 뭐에 걸리기라도 한 것처럼 꽈악 답답해졌다.



20. 후드집업을 껴입으면서 현관을 나선 동해가 가로등 밑에 섰다. 이미 도착해서 전화를 걸었던 건지 두어 개쯤 버려진 담배 꽁초를 발로 툭툭 차고 있던 혁재가 고개를 들었다. 찾아 왔을 이유는 뻔해서 동해는 괜히 입술을 씹었다.


너 걔랑 잤냐?

예상 외의 문장에 동해는 고개를 들어 혁재를 쳐다봤다. 표정이 가늠하기가 어려웠다. 뭔 상관인데. 뱉고 나니까 울컥 감정이 북돋아서 너랑 나랑 그냥 섹파, 아, 이제 그것도 끝났지, 덧붙였다. 마지막에는 목소리가 살짝 떨렸다. 혁재는 그런 동해를 가만히 바라봤다. 가늠하기에 어려움을 겪는 건 혁재도 마찬가지였다. 이렇게 튀고 저렇게 튀고, 대체 종잡을 수가 없었다.



20-1. 그래서 키스했다.



20-2. 가볍게 입술이 맞물리고 혁재의 혀가 동해의 아랫입술을 쓸었다. 느리지만 서로의 혀가 자리를 찾아들어갔다. 잠시 후에 시작했던 것 만큼 가볍게 입술이 떨어졌을 때, 동해는 그대로 주먹을 날렸다. 얻어맞은 혁재가 얼얼한 턱을 매만졌다. 언젠가에도 느꼈지만 저 작은 손이 제법 맵다 싶었다.


예전부터 생각했던 건데, 너 존나 재수없어.


.......


여친한테 차이니까 마지막은 섹파냐? 


내가 찬 거야.


뭐?


차인 게 아니라, 내가 찬 거라고. 너 걔랑 잔 거 짜증 나서.



말문이 막혔다. 묻고 싶은 것도 많고, 쏘아붙일 말도 많았는데 한 문장도 입 밖으로 나오지 않았다. 그래서 니가 왜 짜증이 나는데. 동해는 울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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