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illion Dollar Baby 2
혁재의 코끝에 잘 구워진 토스트 냄새가 감겨들었다. 퍽 오랜만에 맡아보는 따스한 요리 냄새라 혁재는 부스스한 금발 머리를 뻗친 채 잠시 멍하게 침대 끝에 걸터 앉아있다가, 실크 재질의 드레싱 가운을 걸치고서 방을 나섰다. 깔끔한 그레이로 도색된 아일랜드형 주방에는 혁재의 옷을 걸친 동해가 익숙한 손길로 팬을 잡고 있었다. 일부러 몸이 닿일 만큼 옆에 바짝 붙어 유리컵에 물을 따르던 혁재가 잠긴 목소리로 아침 인사를 건네자 동해는 그런 혁재를 힐긋 보고는 잉글리시 브랙퍼스트가 담겨있는 접시 두 개를 식탁 위에 소리나게 내려놓는 것으로 대답을 대신했다.
자기 몫의 요리까지 했을 거라고는 예상하지 못했기 때문에 평소 아침을 잘 챙기지 않는 혁재는 잠자코 앉아서 포크를 들었다. 없는 싸가지에 비해 요리는 꽤 맛이 좋았다.
에그 스크램블 사이에서 올리브 오일 마개가 나온 것만 뺀다면.
식사 후 갓 내린 아메리카노까지 마시고 난 오후가 되면 혁재는 보통 늘어지게 기지개를 켜며 수면을 보충하기 위해 침실로 들어갔고, 동해는 검은 머리칼을 쓸어올리며 집을 나섰다. 통이 좁은 청바지의 뒷주머니에는 45구경 총이 꽂혀 있는 채였다. 동해가 해가 진 후에야 아직은 낯선 공간으로 귀가할 때면 이상하게도 비릿한 철 따위의 냄새가 옷가지에 배여있는 것이라, 후각이 예민한 혁재는 자주 신경이 쓰였다. 그것이 피 냄새라는 사실을 알게 된 건 얼마가 지난 후였다.
샤워실에서 한참이나 물소리가 들려오고 난 다음에 방으로 들어가는 남자의 뒤를 호기심에 밟은 적이 있다. 조그맣게 열린 방문 틈 사이로 스탠다드 램프에서 퍼지는 은은한 빛이 침대에 앉아 상의를 갈아입는 실루엣을 비췄다.
벗겨 놓으면 꽤 근육 잡힌 몸인데, 이상하게 왜 평소에는 작아 보이는지 몰라. 벽에 비스듬하게 기대어 서서 이브닝 와인이 담긴 잔을 든 혁재가 생각했다. 물기가 남아있는 날개뼈 위로 두어개의 큰 흉터와 그 주위를 둘러싸고 얇은 흉터들이 자리 잡혀 있었다. 비교적 큰 흉터는 아마도 총상인 듯 했다. 등 한가운데를 가로지르는 얄쌍하게 패인 라인을 천천히 곱씹듯 훑어내리며 목 뒤로 와인을 넘겼다.
그리고는 램프의 불이 꺼지기 직전, 혁재는 자리를 떴다. 혁재의 드레싱 가운 끝자락이 까맣게 깔린 어둠 사이로 소리 없이 흩날렸다. 문득 뒤를 돌아본 동해는 알싸하게 남은 와인향에 뒷덜미만 쓸었다.
그래도 사방이 막힌 공간에서 먹고 자며 살 부딪히는 이유로 동해는 소소하게 입을 열게 될 것들이 생긴 터였다. 물론 혁재야 처음부터 묻지도 않은 이야기를 늘어놓기 바빴다. 동해가 거실 소파에 앉아 총을 손질할 때면, 혁재는 맞은편 1인용 소파에 기대눕듯이 앉아 주절주절 여러가지 이야기를 했다. 보통 자신에 대한 이야기였으며, 그의 손에는 날마다 다양한 종류의 술이 채워진 각기 크기만 다른 잔이 잘도 쥐여져있었다.
어린 시절 뺀질나게 드나들었던 비밀 공간 이야기, 이 지역의 가장자리에 위치한 폐건물의 괴담 이야기와 같은 것들이 정교한 손길로 분해된 부품을 조립하는 동해의 머리통 위로 쏟아질 때면, 처음엔 한귀로 흘려보냈으나 시간이 흐르면서 누군가 읽어주는 동화책처럼 나긋하게 머릿속 한편으로 내려앉는 것이 느껴졌다. 동해는 혁재가 부모님의 이야기를 끝냈을 때에 유감이네, 하고 대답했다. 진심으로 한 말이었다. 주로 혁재 혼자서 이야기를 하긴 했지만, 점차 그 이야기를 신경 써서 듣게 되는 것도 사실이었다. 두서 없는 이야기의 흐름속에서 두 사람이 처음 만났던 날이 화두에 오르기도 했다.
“그래서 아마 병의 절반을 비웠나?”
“내 생각에, 네 몸은 알코올을 물로 받아들이는 게 분명해.”
“확실히 너는 취했었지. 아무튼, 그날은 총을 쏘고 싶었거든.”
혁재는 제 앞에 놓여있는 조립이 끝난 총을 빠르게 가져와 제 관자놀이 부근에 대었다. 시선을 마주한 동해의 얼굴 근육이 점차 굳었다.
“내 머리에.”
뭐라 말릴 틈도 없이 장전과 함께 곧바로 방아쇠가 당겨지자, 공기와 빈 금속이 부딪히는 소리가 볼품없이 울렸다. 탄창은 테이블 위에 얌전히 올려져 있었다. 묘한 감정이 섞인 동해의 얼굴을 보며 사람 좋게 씨익 웃어보인 혁재가 탄창이 비워진 총을 원래 있던 자리에 내려놓고 몸을 일으켰다. 침실로 들어가는 혁재의 등 뒤로 감정을 알 수 없는 건조한 목소리가 꽂혔다.
“나 곧 떠나.”
그 말을 들은 혁재는 눈썹을 까딱이며 그래, 하고 단조롭게 대답한 뒤 다시 등을 돌렸다. 동해는 텅 빈 거실에서 아직 손길의 온기가 남아있을 것만 같은 총을 가만히 내려보았다. 빠르게 탄창을 조립한 뒤에 장전까지 마치고나서 혁재가 그랬던 것처럼 제 관자놀이에 겨누었다. 뇌간이 시리도록 차가운 금속을 미동 없이 겨누고 있다가 이내 방아쇠에 손가락을 걸어 가볍게 총구를 돌렸다.
괜한 의미 부여는 하고 싶지 않았다.
여느때처럼 단골 술집에서 술 한 통을 부어대다 한밤중이 돼서야 귀가한 혁재는 텅 비어버린 실내 공기에 살짝 멈칫했다. 빛 한 줄기 새어나오지 않는 캄캄한 시야는 바로 앞의 물체도 분간하기 어려웠다. 그럼에도 혁재는 거실 등의 스위치를 그냥 지나쳤다. 수많은 전구들이 빼곡히 자리한 샹들리에가 켜지면 부재의 존재를 환하게 밝힐까 봐, 그걸 오롯이 두 눈으로 확인하게 될까 봐 대신 더듬더듬 동해가 지내던 방으로 발걸음을 끌었다.
손가락 끝으로 닫힌 문을 밀어낸 혁재는 시야가 어둠에 적응될 때까지 잠시 기다렸다. 점차 윤곽이 잡혀들자 침대 위에 누워있는 동해의 등이 제일 먼저 시선에 꽂혔다. 알 수 없는 한숨이 낮게 깔렸다. 혁재는 까맣게 엉킨 어둠처럼 혼란스러운 감정을 느끼며 동해에게 다가섰다. 옆으로 누워 잠이 든 동해의 얼굴이 밤하늘에 비추어져 푸른 빛을 담았다.
한 올씩 부드럽게 내려앉은 속눈썹과 조각한 듯 매끄럽게 뻗은 콧대. 그리고 붓으로 그린 듯 단정한 입가와 얇은,
입술.
혁재는 홀린 듯 그 입술에 시선을 고정한 채 얼굴을 가까이 했다. 선홍빛의 말캉한 그것이 점점 눈앞에 크게 들어찰 때마다 심장 박동 또한 착실하게 빨라졌다. 자기도 모르게 꿀꺽 삼킨 침이 목울대를 울렁인 순간 관자놀이에 닿아오는 차가운 총구에 혁재는 가만히 시선만 위로 옮겼다. 분명한 눈동자로 저를 노려보는 동해를 마주하자 혁재는 이제 헛웃음이 나올 지경이었다.
얘 진짜 뭐야?
“훔쳐보는 못된 습관이 있는 줄은 몰랐네.”
“잠자리를 이런 거랑 같이 하는 습관보단 낫지.”
여유로운 눈빛과 단호한 눈빛이 허공에서 한참을 얽혔다. 주위를 둘러싼 모든 것이 소리를 잃은 듯 고요한 밤공기에 긴장된 눈빛이 느슨하게 늘어지고 갈구의 욕망이 찰랑거릴 때, 두 사람의 몸이 동시에 서로를 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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