혁재는 7통의 발신 목록이 뜨는 것을 마지막으로 홀드 버튼을 눌렀다. 화면이 꺼진 휴대폰으로 한숨 소리가 커다랗게 끼쳤다. 이럴 거면 자취방에 더 있다가 올 걸 그랬다. 종강을 하자마자 그닥 많지 않은 짐을 챙겨 본가로 내려왔더니, 결과는 홀로 보내는 크리스마스 이브였다. 7통 중 3통은 내일 여자 친구 만나야지. 너랑 술 먹으면 나 26일에 일어난다. 의 뉘앙스였고, 2통은 눈이 너무 많이 와서 가기가 힘들다-귀찮다- 의 것이였다. 또 다른 2통은 이미 애인 혹은 가족과 행복한 시간을 보내는 중인지 부재중 전화로 돌려졌다. 그러니까, 나는 같이 보낼 애인은 고사하고 왜 가족도 옆에 없냐고. 혁재는 오늘 아침 사람 2명은 거뜬히 들어갈 만한 캐리어를 끌고 손끝에서 파리행 티켓을 흔들거리며 집을 나선 부모님을 떠올렸다. 지금쯤이면 도착했을지도 몰랐다. 부모님의 건재한 연애 진행에 다 큰 아들이 끼어들 자리는 아주 조금도 없어 보였기에 혁재는 자다 일어나 눌린 머리로 어정쩡하게 손을 들어 배웅을 했을 뿐이었다.
어떻게든 혼자 보내는 것은 피할 것에서 어떻게 하면 혼자서 잘 보낼 수 있을까로 전략 주제가 바뀌었다. 침대에 늘어진 채로 멍하니 눈을 깜빡이던 혁재는 창밖으로 시선을 돌렸다. 눈송이는 하늘 전체에 솜뭉치를 한가득 풀어놓고 밑에서 마구잡이로 당기는 것처럼 쉴 새 없이 내려댔다. 앞으로 몇 시간만 더 내린다면 대부분의 사람들이-주로 커플이겠지- 고대하는 화이트 크리스마스를 맞이할 수 있을 테였다. 유독 커다란 눈송이가 혁재의 눈에 띄었다. 그 커다란 눈송이는 점점 더 몸집이 불어나더니 혁재의 방 창문과 가까워졌다. 조금 이상함을 느낀 혁재가 침대에서 몸을 일으키자마자 꿍! 하는 소리와 함께 유리창 한가운데에 눈 결정을 조금 묻히고는 푸다닥 창문 발코니로 떨어지는 것이었다. 놀란 혁재가 창문을 열고 발코니를 내려보자 통통하게 쌓인 눈계단 위로 동그란 구멍이 나 있었다. 혁재는 구멍 안쪽으로 떨어진 작은 물체를 엄지와 검지 끝으로 집어올렸다. 물컹한 감각에 오소소 소름이 돋았다. 떨어지면서 표면에 붙은 눈들이 떨어졌는지 혁재는 아주 확실하게 인식할 수 있었다. 뒤집어 올린 탓에 거꾸로 돌아간 눈, 코, 입을.
크리스마스 합작 :: 나 홀로 집에
요정님이 보고 계셔
w. dd
“나는 설(雪)국 국토교통부 2차관 소속 동해라고 한다.”
......뭐야? 혁재는 자기 앞에 있는 손가락만 한 물체를 어안이 벙벙한 얼굴로 바라봤다. 분명 입에서 내뱉는 말은 한국어인데 귓속으로 들어오기도 전에 이상한 상형문자로 바뀌어 튕겨져 나가는 것만 같았다. 만약 혁재가 이 말을 태극 로고가 박힌 커다란 건물 앞에서 중년의 남자에게서 들었다면 아, 네, 그러시구나. 하고 넘어갔을 지도 모른다. 그런데 눈앞에 있는 건, 작고, 작으며, 작은.
“요정?”
어깨에 달려있는 눈처럼 하얀색의 날개를 보고 합리적인 결론을 도출해 낸 혁재가 무심코 뱉었다. 그말을 들은 날개 달린 물체는 무엇인가 불만인지 아직 눈송이가 붙은 날개를 심하게 파닥거렸다. 덕분에 바닥에 떨어진 눈송이들이 녹아 작은 물웅덩이가 생겼다.
“마음에 드는 단어는 아니다만, 인간들의 세계에서는 그렇게 통용되는 것 같으니 호칭을 허락하겠다.”
허락이고 나발이고. 혁재는 아직 이 상황이 제대로 이해가 되지 않았다. 꿈인가? 영화나 드라마속에 비현실적인 상황을 맞닥뜨리면 꼭 하는 클리셰처럼 제 볼을 꼬집어 볼까 생각도 했지만, 그러기도 전에 주위의 약간은 차가워진 공기, 사부작 눈이 내리는 소리, 체내에서 전해지는 맥박 따위가 너무나도 현실임을 알려주었다. 그래, 요정이라고 치자.
“갑자기 우리 집에는 왜 나타난 거야?”
“나는 국토교통부의 업무를 위해 다른 팀원들과 서쪽으로 순찰을 도는 중이었다. 크리스마스 당일 새벽, 산타를 태운 루돌프들이 주행할 길에 장애물은 없는지, 혹시 이정표가 잘못 되어있지는 않은지 검토해야 했거든. 그런데 자율비행센서가 고장 나는 바람에 여기로 떨어진 거지.”
조 어쩌고 이름을 가진 -아마도 다른 요정인 듯한- 대상을 향해 대체 점검을 어떻게 하고 있는 거야, 투덜댄 작은 요정이 혁재의 얼굴을 빤히 바라보며 당당하게 말했다.
“수동비행으로는 이미 멀어진 팀원들 대열에 합류할 수 없으니, 여기서 조금만 머무르겠다. 크리스마스가 되기 전까지 순찰을 마친 팀원들이 다시 돌아올 것이다.”
애초에 집주인의 대답은 개의치 않았다는 듯이 요정은 서 있던 혁재의 책상 위로 벌러덩 누워버렸다. 하, 혁재는 기가 찼다. 입 밖으로 나온 헛웃음이 요정의 머리칼을 휘젓자 누워있는 상태에서 인상 쓴 얼굴을 들어 불쾌하군, 내뱉는 장면은 더 기가 찼다.
뻔뻔하게 쫑알거리는 요정의 목소리도, 파득거리는 날개짓 소리도 들려오지 않자 혁재의 방은 갑자기 적막이 내려앉았다. 자는 건가? 드러누운 요정의 몸통이 아주 미세하게 들썩거렸다. 혁재의 얼굴이 점점 더 요정에게 다가가고 있는데, 별안간 벌떡 일어난 요정이 날개짓을 요란하게 하며 공중을 날았다.
“와, 씨. 깜짝아!”
“배가 고파서 잠을 잘 수가 있어야지. 먹을 걸 준비해 오거라.”
먹을 걸 준비해 오거라? 오거라아? 대놓고 하대하는 말투와 행동에 더 이상 참을 수가 없어진 혁재는 얼어 죽든 말든 –근데 설국 요정이 얼어 죽을 수가 있나?- 내 집 밖으로 쫓아내리라 다짐하며 요정이 날아다니는 공중으로 손을 뻗었다.
“오, 해 보겠다 이거지?”
요정은 오히려 혁재가 손을 뻗을 때마다 날개를 움직여 유연하게 방향을 바꾸었다. 허공에 손을 허우적대는 혁재를 우스워하는 표정이 그대로 드러나 있었다. 한참 동안 온 방을 휘젓던 혁재가 헉헉거리며 숨을 몰아쉬었다. 전혀 힘든 내색 없이 팔랑팔랑 혁재의 얼굴 높이로 하강을 한 요정이 의기양양하게 외쳤다. 먹을 거!
목청도 더럽게 좋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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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도 출출하니까, 내가 먹을 거 챙겨가려고 하는 거야. 중얼중얼 자기합리화를 하며 냉장고 문을 연 혁재는 새빨간 자태로 시선을 끄는 딸기를 꺼내들었다. 쏟아지는 물속에서 뽀득뽀득 딸기들이 깨끗하게 씻겨졌다. 그릇에 옮겨 담기 전 하얀 손으로 딸기 하나를 꺼내들어 입으로 쏙 밀어 넣은 혁재가 입안 가득 퍼지는 상큼함을 느끼며 발로 방문을 열었다. 야, 요정. 너 이런 거 안 먹어 봤,
“지...... 뭐 하냐?”
혁재는 방 안에서 제 안경을 끙끙거리며 들어 올리고 있는 요정을 보며 물었다. 얼마나 힘을 썼는지 얼음처럼 하얀 얼굴이 시뻘겋게 달아올라 있었다. 혁재와 눈이 마주치자 요정은 쳇, 하는 소리를 내며 공중에서 안경을 들고 있던 손을 놓았다. 뭐하는 거야. 바닥에 떨어진 안경을 주워 원래 위치해 있던 책상에 내려놓자 그 손길을 따라서 책상에 걸터앉은 요정이 말했다.
“뭐긴 뭐야, 훔치려는 거지. 인간들은 값비싼 것들을 모으는 취미가 있다고 들었거든. 저것도 반짝거리는 것을 보니 꽤 비싼 모양이지?”
동네 안경점에서 삼만 원 주고 맞춘 거다, 멍청아. 나참. 도둑 요정이라니. 어떤 요정이 도둑질을 해? 비리 공무원 뭐 그런 건가. 전혀 어울리지 않는 상황을 이리저리 씹으며 의자에 앉은 혁재가 책상 위에 딸기가 가득 담긴 접시를 놓자마자 요정이 반색했다.
“딸기! 내가 좋아하는 과일 첫 번째가 딸기다!”
“너의 티엠아이는 더 이상 알고 싶지가 않아.”
요정이 설렘에 붕붕거리며 날개를 흔들든 말든 혁재는 잘 익은 딸기를 한입에 밀어 넣기 바빴다. 너 혼자 먹는 것이냐! 벌써 세 개나 혁재의 입속으로 사라진 딸기에 안달이 난 요정이 씩씩거리며 화를 냈다. 들은 체도 안 하자, 혁재 주위를 마구 날아다니며 머리칼을 잡아당기거나 드러난 목덜미에 눈곱만한 얼음 결정을 날렸다. 어떤 방법도 먹히지가 않는 것을 느끼고는 요정은 잔뜩 부은 얼굴로 중얼거렸다. 눈치는 꽤 빠른 것 같았다.
“하나만 주면...... 안 되냐......”
“뭐라고? 너무 작아서 안 들려. 물론 몸이랑 목소리 둘 다.”
손가락으로 요정을 가리키며 놀리듯이 대꾸하자 요정은 꽉 다문 입술 사이로 볼에 빵빵하게 바람을 집어넣었다. 혁재는 왠지 웃음이 나올 것만 같았다.
“아, 하나만 달라고!”
눈까지 질끈 감고 꽥 소리를 지르는 통에 혁재는 결국 풉, 하고 웃음이 터졌다. 쬐끄만한 게 성질머리가 여간이 아니었다. 자, 먹어라, 먹어. 마지못해 건네주는 척 딸기를 하나 골라 품 안에 쥐어주자 투덜거리며 책상 위에 자리를 잡고 앉는다. 힐긋 혁재 눈치를 한 번 보더니 품 안에 가득 담긴 딸기 끄트러미를 와앙 베어 물었다. 황홀한 표정으로 열심히 오물거리는 볼따구는 짐짓 모른 척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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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만 달라고 할 때는 언제고, 딸기를 정말 좋아하는지 혁재가 건내주는 족족 품 안에 꼭 끌어안고 먹기 바쁘다 보니 결국 사이좋게 한 접시를 비웠다. 시계를 확인하니 크리스마스가 되기까지 한 시간이 채 남지 않은 시간이었다. 저런 싸가지 없는 요정 새끼랑 보내는 크리스마스 이브라니. 혁재는 하얀색 제복 위에 얼룩덜룩 딸기즙을 잔뜩 묻혀놓은 요정을 보며 생각했다. 그러거나 말거나 요정은 꽤 만족한 듯 보였다. 조금 붉어진 입술로 허무맹랑한 소리를 늘어놓는 걸 보면.
“소원 하나 들어주겠다니까? 엄밀히 말하면 내가 아니라 산타가 들어주는 거지만. 내가 자국으로 돌아가자마자 산타에게 은밀히 말 해 놓겠다. 아아, 예산 범위 안에서.”
혁재는 걱정 마, 울어도 돼. 사실 산타는 없거든. 하며 디스 배틀로 동심파괴를 자행했던 쇼 미 더 머니의 한 래퍼를 떠올리며 콧방귀를 끼었다. 이 세상에 산타가 어디 있어.
“있다니까!”
“알았어, 알았어. 그것보다 너 안 가냐? 11시 50분이야.”
“갈 거거든. 하여튼 고집만 센 인간이로군.”
누가 하고 싶은 말인지. 혁재는 날개를 점검하며 비행할 준비를 하는 요정에게 통로를 열어주기 위해 창문 옆에 섰다.
“자율 어쩌고 고장 났다며. 팀원들 어디 있는지는 알아? 거기까지 갈 수 있냐?”
“뭐야, 걱정이라도 하는 것이냐.”
“걱정은 아니고. 유리창에 또 처박힐 거면 아예 창문 안 닫고 있으려고.”
자존심이 상한 요정이 또 숨을 크게 몰아쉬며 혁재의 뺨으로 얼음 결정을 날렸다. 간지럽지도 않았다. 뺨에 작게 맺힌 물방울을 닦아내며 혁재는 유리창 문을 열었다. 온통 새하얗게 내려앉은 밖으로 나가기 전 요정은 날개를 세차게 파드득 댔다.
“간다.”
왠지 모르게 주머니속이 두툼해 보이는 요정은 내리는 눈송이들 사이로 크게 회전하며 팔랑거렸다. 지나간 자리에 반짝거리는 얼음 결정이 작게 흩날렸다. 12시. 화이트 크리스마스였다.
“메리 크리스마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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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혁재는 그날 새벽 우연히 잠에서 깨었을 때, 창문 밖 사이로 새하얀 하늘 한가운데 딸기를 닮은 빨간색의 무언가가 지나가는 것을 본 것도 같았다.
epilog
“내일 휴무시죠?”
“엉.”
“부럽습니다. 저는 바로 주간 근무하지 말입니다.”
“엉.”
“뭘 그렇게 보십니까?”
“야, 이거 봐 봐. 되게 반짝거리지? 이게 뭐냐면 내가 인간한테서 훔쳐온 거거든.”
“헉. 어떻게 가지고 오셨어요?”
“다 방법이 있지.”
“딱 봐도 엄청 값비싸 보입니다.”
“그러니까. 그 인간 나한테 다 털려서 쫄딱 망했을지도 몰라.”
그렇게 말한 동해는 조류 혹은 인물의 초상화가 그려진 은빛 동전들을 가방 속에 소중히 집어넣었다. 귀중한 것을 잃어버려 울상을 지을 인간의 표정을 생각하니 키득키득 웃음이 새어나왔다. 꼴좋다. 내년 크리스마스 이브에 확인해 보러 가야지. 입가에 맴도는 새콤달콤한 딸기맛에 동해는 괜히 날개를 한 번 퍼덕였다.
